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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경제 불균형, 흑자국의 정체, 경제 이야기

경제

by 경제학자 양나희 2025. 5. 2.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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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참 아이러니한 존재입니다. 자본이 부족해서 성장하지 못하던 시절엔, 돈이 있으면 뭐든 될 것 같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세계 곳곳의 흑자국들로 알고 있는 독일, 일본, 중국, 그리고 북유럽 국가들이 막대한 자본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그 돈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넘치는 외환보유고, 기업의 현금자산, 가계의 초과 저축. 이 모든 자금은 경제라는 심장에 피처럼 돌아야 하는데, 지금은 혈관이 막혀 흐르지 않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자본이 많다는 것이 곧바로 경제의 건강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이 역설, 바로 그 핵심을 파헤쳐 보아야 합니다.

축적의 역설, 넘치는 자본, 사라진 투자
축적의 역설, 넘치는 자본, 사라진 투자

글로벌 경제 불균형

글로벌 경제 흑자국은 기본적으로 수입보다 수출이 많아 외화를 버는 국가입니다. 이 말은 곧, 자국 내 소비나 투자가 충분하지 않아 국외로 자본을 보내는 국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때 자본의 이동은 반드시 효율적이지는 않습니다. 흑자국의 자본은 종종 미국의 채권시장이나 안전자산으로 몰려갑니다. 실물투자보다는 금융적 수익을 쫓는 단기적, 비생산적 자본이동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현상은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이 말한 글로벌 세이빙 글럿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요컨대, 흑자국의 과도한 저축은 글로벌 자본시장의 비효율성과 자산 거품을 초래하며, 결과적으로 경제에 해를 끼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경제란 결국 사람과 자원의 효율적 배분인데, 그 자본이 아무도 일하지 않는 채권에 묶여 있다면, 그것은 성장의 불씨가 아니라 정체의 상징입니다.

 

자본이 제대로 사용되지 않는 데에는 단순한 돈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제도와 정치의 병목입니다. 독일을 예로 들어보면 독일은 유로존 내에서 독보적인 수출 강국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내수 시장은 극단적으로 위축되어 있습니다. 사회보장 지출의 경직성, 임금 억제 정책, 가계소득의 불균형은 소비를 위축시키고 기업의 투자 유인을 저해합니다. , 돈은 있는데 쓸 환경이 없는 겁니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업들이 막대한 현금을 쥐고 있지만, 노동시장의 유연성 부족과 고령화는 내수 확장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중국은 국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외환보유고를 쌓아두고 있으나, 민간투자의 자율성과 자본의 자유로운 흐름이 제도적으로 제약받고 있습니다. 자본은 자유를 원하지만, 정치경제 구조는 그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역설, 바로 이 지점에서 흑자국은 자본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자본의 왜곡된 흐름

고전경제학의 세계에서는 자본이 많아지면 이자율이 떨어지고, 이자율이 떨어지면 투자가 늘어나며, 경제가 성장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이자율이 더 이상 투자 유인의 신호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구조적 저금리상태에 들어선 것입니다. 민간 부문은 자본을 축적하지만, 불확실성과 수요 부진 속에서 장기 프로젝트나 혁신적 투자에 나서지 않습니다. 결국 자금은 중앙은행의 계좌에 쌓이거나, 국채 시장으로 쏠리고, 실물경제에는 닿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경제의 고질병입니다. 경제라는 유기체는 자본이라는 영양분이 공급되어야 성장하지만, 지금은 영양과잉으로 인한 내장 비만 상태인 셈입니다.

 

흑자국의 자본이 효율적으로 쓰이지 않으면, 그 파장은 자국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글로벌 차원의 리스크를 야기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2008년 금융위기입니다. 중국과 독일의 경상수지 흑자가 미국의 저축 부족과 소비 과잉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곧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의 자산 거품과 금융 부실을 촉발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흑자국이 자본을 제대로 쓰지 못하면, 자산 가격 왜곡, 신흥국 자본 유출입 불안정, 그리고 통화전쟁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경제는 국경이 없습니다. 하나의 흑자는 다른 누군가의 적자이며, 그 상호작용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결국 세계경제 전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흑자국은 넘치는 자본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지 정답은 결코 단순하지 않지만, 흐릿한 안개 속에서도 뚜렷이 보이는 방향은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자본이 미래를 위한 토양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눈앞의 수익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성장의 토대에 투자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있어도 그것이 돌지 않으면 의미가 없듯, 민간 부문이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제도적 여건 역시 갖추어야 합니다. 경직된 노동시장, 창업을 가로막는 복잡한 규제, 불확실한 법제도는 자본의 순환을 방해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입니다.

경제 협력의 절실함

경제 제도의 유연성과 예측 가능성을 회복하는 것은 경제 개혁을 넘어선, 경제 구조 자체의 리모델링입니다. 결국 경제는 구조이고, 자본은 그 구조 속에서 방향성을 가질 때 의미가 생깁니다. 축적된 자본이 제자리에 머물며 빛을 잃지 않기 위해선, 그 흐름을 설계할 정치적 용기와 정책적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자본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움직이는 방향을 봐야 할 시간입니다. 이 모든 과정은 각국이 혼자서 풀 수 있는 퍼즐이 아니라는 점에서, 국제적 협력 또한 절실합니다. 글로벌 자본이 상호 얽혀 있는 지금, IMF G20 같은 다자간 기구의 정책 조율 없이는 어떤 나라도 균형 있는 자본 흐름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흑자국은 단지 돈 많은 나라가 아니라, 그 자본이 세계경제 전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자각해야 하는 책임 있는 주체입니다. 도시의 낡은 인프라를 재정비하고, 친환경 에너지와 탄소중립을 향한 기술에 재정을 집중하며, 교육과 디지털 전환 같은 인적 자본에 자금을 투입하는 것. 이러한 공공투자는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장기적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기반입니다. 그와 동시에, 내수의 심장인 가계가 제대로 숨쉴 수 있도록 소득 분배의 축을 조정하는 일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소비를 일으키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고, 사람의 지갑이 열리기 위해선 충분한 소득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마치며

흑자국이 자본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시대. 그것은 단지 제도나 시장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선택과 경제적 철학의 문제입니다.

경제란 언제나 숫자 뒤의 의미를 묻는 학문입니다. 흑자란 이익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균형의 징후이며, 기회가 사장되고 있는 신호입니다. 자본은 축적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순환되고 배분되기 위해 존재합니다. 흑자국이 진정한 책임을 다하려면, 그 자본을 미래를 위해, 사람을 위해, 지속가능성을 위해 써야 합니다. 자본은 자유를 원하고, 경제는 순환을 원합니다. 그 흐름이 멈추는 순간, 숫자 뒤의 경제는 말라가고, 성장은 단지 회고 속의 단어로 남게 될 것입니다결국 경제는 구조이고, 자본은 그 구조 속에서 의미를 가집니다흑자라는 숫자에 도취되어선 안 됩니다. 그 자본이 어디에 쓰이는지를 따져 묻는 일, 바로 그 지점에서 경제정책은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경제의 시작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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