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본능적으로 생명을 이어가려는 존재이지만, 현대 사회에선 그 본능조차 시장 앞에서 주춤거립니다. 출산이 더 이상 축복의 상징이 아니라 불안과 두려움의 상징이 되는 세상. 우리는 지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회를 살아갑니다. 말 그대로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도 채 되지 않고, OECD 국가 중 압도적인 최하위의 통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0.7 숫자 뒤에는 수많은 개인의 단념과 희망 대신 포기를 말하는 사회구조가 숨어있습니다. 경제의 생산 가능 인구가 사라지고, 노동시장의 활력이 감소하며, 연금과 의료 재정의 지속가능성마저 흔들리게 하는 가장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경고음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와중에도 복지국가를 유지하거나, 오히려 더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복지라는 말, 흔히 돈을 나눠주는 제도라고 오해되곤 합니다. 하지만 진짜 복지는 위험에 대한 집단적 방어 시스템입니다. 출산·육아·교육·노동·실직·질병·노령 등 삶의 모든 불확실성을 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방식으로 해석됩니다. 즉, 복지는 사회적 연대의 경제 시스템입니다. 그리고 이 연대가 약해지면, 개인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위축되고, 그 결과 출산과 소비, 모든 경제활동이 위축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지 확장이 저출산 문제의 핵심 대안으로 주목받는 이유입니다. 출산은 생물학적 결정이기 전에, 사회적·경제적 결정이며, 정책적 환경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입니다. 따라서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복지국가의 새로운 사명이 시작됩니다. 유럽의 복지국가들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출산율 하락이라는 긴 싸움을 해왔습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와 스웨덴의 정책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스웨덴은 무려 출산 후 480일의 육아휴가를 제공합니다. 그중 아버지에게도 최소한의 사용 의무를 부과합니다. 즉, 성평등한 육아의 문화를 법과 제도로 강제한다고 봐도 무관합니다. 또한 보육 서비스는 거의 무상에 가깝고, 모든 가정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스웨덴은 유럽에서도 상대적으로 높은 출산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육아휴직을 제도로서 마련만 하고 끝이 아니라, 아버지의 참여를 보장하는 방식의 제도는 문화를 재편하는 도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프랑스는 다자녀 가정에 대해 소득세를 경감해주고, 어린 자녀가 있는 가정에 매달 현금 지원을 제공합니다. 또한 아동 돌봄 인프라를 국가 주도로 확장했습니다. 복지를 통해 출산은 개인이 감당해야 할 위험이 아니라 기회비용을 사회가 분담한다는 원칙이 프랑스식 대응의 핵심입니다. 이들 국가는 복지를 통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조건을 제도적으로 확보한 것입니다. 출산율이 다소 회복된 것도, 그 조건들이 실제로 효과를 발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국도 복지 확장을 시도해 왔습니다. 출산장려금, 영아 수당, 첫만남이용권 등 이제 출산 직후 몇백만 원 정도는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육아, 교육, 직장 복귀까지 이어지는 복지의 사슬이 끊겨 있다는 것이 핵심 비판이기도 합니다. 육아휴직은 있지만, 복직은 눈치가 보이며, 여전히 엄마에게 집중되어 있고, 남성 육아휴직 사용률은 30%도 되지 않고, 직장 복귀는 어렵고, 시간제 일자리는 불안정합니다. 한국은 제도와 재정 모두 과거에 비해 복지국가의 궤도에 올라서려 하고 있지만 여전히 제도 간 단절과 사회의 신뢰 부재라는 문제가 큽니다. 즉, 한국의 복지는 여전히 출산 이후의 삶을 시스템으로 보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떠한 혜택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흩어져 있다는 느낌이 큽니다. 한 아이가 자라며 겪게 될 수많은 위험을 하나의 보호막으로 엮어주는 것이 복지라는 점에서 봤을 때 한국은 아직 복지국가로서의 길목에 서 있는 현실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최근 기본 소득이나 서울시의 부모 급여 확대 등은 삶의 유연성을 제공하고, 출산 결정에 여유를 주는 제도로 주목은 받습니다만, 모든 사람에게 일정한 금액을 주는 기본소득이 재정적으로 지속 가능한 여부에 대한 논란은 늘 쟁점으로 부각됩니다. 또한, 지금처럼 출산율이 급감한 시점에서는 정책의 패러다임 자체를 흔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복지를 늘리면 경제가 나빠진다는 고정관념은 버릴 때가 되었습니다. 사실, 복지국가일수록 고용률은 높으며 노동시장 유연성도 잘 작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복지로 인해 노동의 리스크를 줄여주고 더 많은 경제 활동 참여가 유도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독일, 스웨덴 등 복지국가들은 장기적으로 더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이뤄왔습니다. 따라서 복지는 경제성장의 적이 아니라 미래 성장의 기반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그것이 복지국가의 사명입니다. 직장을 잃을까 두렵고, 육아는 오롯이 여성의 몫이며, 교육비는 감당이 되지 않는 사회라면 어느 누구도 감히 출산을 꿈꿀 수 없을 것입니다. 복지국가는 출산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복지국가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출산을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을 사회가 함께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경제의 지속성, 국가의 존속, 그리고 인간 존엄에 대한 실천적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복지국가의 존속은, 그 나라의 젊은 세대가 그래도 이 사회에서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겠다고 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 믿음을 회복하는 일, 그것이 복지국가의 다음 단계이며 가장 중요한 약속입니다.
환경경제, 기후금융, 경상수지, 경제 이야기 (1) | 2025.05.14 |
---|---|
저유가의 거시 경제적 파급효과, 개발 도상국의 반사 이익, 경제 이야기 (3) | 2025.05.13 |
달러 불균형, 경제 다극화와 재균형, 글로벌 경제, 경제 이야기 (3) | 2025.05.10 |
CBDC, 경제 디지털 전환, 탄소 국경세, 경제 이야기 (0) | 2025.05.09 |
녹색 산업, 기후 위기 시대 경제, 경제 이야기 (0) | 2025.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