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세계가 달러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미세한 틈에 진동이 언젠가 균열로 번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 틈새를, 이제 글로벌 남반구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1969년, 베트남전과 금태환의 압박으로 미국 경제가 흔들릴 즈음, 국제통화기금(IMF)은 새로운 유동성 수단을 창안했습니다. 이름하여 특별인출권인 SDR입니다. SDR은 일종의 국제 준비자산으로, IMF 회원국들이 외환 위기에 처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권리였습니다. 이 시스템은 원래 달러 의존도를 완화하고 국제 유동성 부족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지금, SDR은 그 태생의 이상과는 달리 여전히 기축통화 국가 중심의 권력구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IMF 내 의결권 구조는 GDP와 외환보유고 등을 기준으로 부여되며, 미국은 약 17%의 단독 거부권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는 SDR 발행량과 배분방식이 사실상 G7 국가들의 이해관계에 좌우된다는 뜻입니다. 전 세계 최빈국들이 아무리 위기에 몰려도, 의결권이 없으면 유동성은 배분되지 않습니다.
SDR은 달러, 유로, 위안, 엔, 파운드 다섯 통화의 바스켓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다극적이나, 실제 가치 비중의 83%가 달러와 유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는 SDR이 기축통화의 그림자에 머무르는 구조적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구조는 지금, 글로벌 남반구의 심장부에서 강한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브릭스, G24, 아프리카 연합 등으로 대표되는 글로벌 남반구는 최근 SDR의 구조적 개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억지로 SDR을 더 많이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국제 유동성 공급 시스템 자체를 재개편하자는 것입니다. 이유는 여러가지입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IMF는 이례적으로 6,500억 달러 규모의 SDR을 신규 발행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SDR의 약 60%가 선진국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점입니다. 가장 절실했던 저소득 국가들은 전체 SDR의 3%도 받지 못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우리는 환자지만, 약은 부자에게 간다.” 였습니다. 이 불균형이야말로 남반구 국가들이 분노한 핵심입니다. 그들의 요구안은 첫번째, SDR 배분기준을 필요기반으로 변경하고, 두번째, 지역통화 기초자산으로 인정할것, 세번째, 개발금융과 기후대응 자금으로 전환하는 메커니즘으로 만들자라는 요구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주도하는 여러 국가들은 자국의 금융 안정망을 다변화하고, 미국 달러에 대한 구조적 의존을 줄이기 위한 공동 전략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즉, SDR 개혁은 남반구 리더십의 등장과 그 정당성을 입증하는 국제 무대가 되고 있습니다.
G2, 즉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질서는 한때 협력과 경쟁이라는 균형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8년 이후 미·중 전략경쟁이 격화되며, 이 균형은 점차 무너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달러 패권 유지를 위해 금리 인상, 자산 축소, 금융제재 등을 강화하고 있는 반면, 중국은 디지털 위안화 실험과 역내결제 시스템을 통해 탈달러 질서를 구축하려 합니다. 이러한 흐름은 IMF 내에서의 협력마저 어렵게 만듭니다. SDR 확대나 개혁이 논의될 때마다 미국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이고, 중국은 자국의 위안을 SDR 비중에서 확대하기 위해 은밀한 외교전을 펼칩니다. 즉, SDR은 미·중의 정치적 대리전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글로벌 남반구의 불만은 왜 생존 도구가 G2의 힘겨루기 도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불만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 대안을 만들고 있습니다.
2023년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브릭스 정상회의는 브릭스 금융 안정기금 설립 논의를 공론화했습니다. 이 기금은 SDR과 유사한 방식으로 회원국 간 통화를 상호 보완하고, 미국 달러가 없는 상황에서도 위기 대응 자금을 공급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습니다.
브라질은 이를 통해 남미 경제 블록의 결제통화 다변화를 꾀하고 있으며, 남아공은 아프리카개발은행을 통한 SDR 기반 기후금융을 추진 중이고, 인도는 아세안 국가들과의 루피 결제 시스템을 확대하며 환위험 축소를 실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IMF나 세계은행의 기존 체제에 대한 반기라기보다는, 공백을 채우는 리더십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립니다. G2가 협력을 포기하고, 글로벌 유동성 공급이 정치화되는 지금, 남반구는 스스로 생존과 재건의 길을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SDR은 진정한 글로벌 통화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조건은 명확합니다. IMF의 의결권 구조 개편은 필수이며, SDR이 기축통화의 대체자가 되려면, 사용 범위와 활용 기능이 획기적으로 넓어져야 합니다. 또한 SDR을 국제개발자금, 기후대응자금, 식량위기 대응기금과 연계시키는 체계적 메커니즘이 필요하다는 조건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정치적 상상력과 다자적 리더십의 복원이라고 주장합니다. 미국과 유럽이 한발 물러나고, 브릭스와 글로벌 남반구가 적극적 역할을 하며, IMF가 다시금 글로벌 공공재를 관리하는 기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SDR은 단지 과거의 유산에 머무를 것이고, 세계는 다시 달러 의존, 금융 불균형, 외환위기라는 고질병의 순환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IMF 개혁은 수십 년 전부터 남반구 국가들은 입을 모아 요구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논의가 지금처럼 국제통화질서의 전환과 맞물려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 적은 드뭅니다. 가장 시급한 개혁 과제는 쿼터와 의결권 구조의 재조정입니다. IMF에서 각국의 의결권은 쿼터를 기준으로 정해집니다. 하지만 이 쿼터는 세계 경제에서 실제 비중과 완전히 괴리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전체가 가진 IMF 의결권은 5%가 채 되지 않지만, 이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IMF 프로그램을 실행 중입니다. 중국은 세계 2위 경제지만 미국의 절반도 되지 않는 의결권을 가지고 있고, 브라질, 인도, 나이지리아 같은 신흥국은 여전히 고객 국가로만 대우받고 있습니다. 또한 IMF의 집행이사회는 주요 8개국이 상시 멤버로 존재하는 비공식 G7 중심 구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실제로 주요 결정을 좌지우지하는 미국은 약 16.5%의 지분으로 단독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입니다. 이처럼 IMF의 구조는 여전히 전후 패권구조의 산물이며, 오늘날의 다극화된 세계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도전은 전통적인 외환위기보다 훨씬 복합적입니다. 팬데믹, 기후위기, 식량 불안, 채무 위기 등 이 모든 위기는 글로벌 공공재의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다. 따라서 IMF 개혁은 단지 구조 조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에 그 기능과 임무 자체를 재정의하는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합니다. IMF는 기후재정의 중추로 나아갈 수 있고 SDR을 보건·식량 위기에 활용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 수 있으며, 부채 재조’을 넘어, 지속가능한 성장을 도모하는 장기투자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는지 거듭나야할 것입니다. 이제 IMF는 단순한 마지막 대출자가 아니라, 전 지구적 시스템 관리자로 진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글로벌 남반구는 단지 수혜자가 아니라 설계자여야 하며 리더십은 북반구가 물러나야 비로소 자리를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IMF 개혁을 둘러싼, 그리고 새로운 금융질서를 향한 가장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닐까 합니다.
세계 경제는 지금 균열의 시기에 있습니다. 기축통화로서의 달러는 여전히 강력하지만, 그 기반은 전과 같지 않습니다. G2 체제는 공공재 공급자로서의 역할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으며, IMF는 그 사이에서 방향을 잃은 채 과거의 설계도를 붙잡고 있습니다. 이 틈을 글로벌 남반구가 채우려 하기에 SDR의 재설계는 단지 기술적 수단이 아니라, 세계경제의 권력지형을 다시 그리는 정치적 선언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경제 개혁이 아니라, 글로벌 연대와 공공선의 재정의이기도 합니다. 남반구는 그 자격이 있는지 돌이킬수 없는 강을 건너야 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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